분양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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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흥 토지 땅 임야 주택 밭이 있는 바다조망이 있는 토지매매 전망좋은 곳
고흥 바다가 보이며 도로보다 높은 위치에 있는 주택 밭 임야 매매합니다.
고흥 약초 버섯 채소 유실수 가꾸기 좋은 곳 전망이 좋은 곳 넓은 토지매매
고흥군 포두면 옥강리 밭 주택 임야가 있는 곳을 매매합니다.
토지의 면적은 밭이 4,000㎡ 그리고 대지가 650㎡ , 임야가 11,131㎡입니다.
총 면적은 15,781㎡이며 매매가는 3억2천 만 원입니다.
용도지역은 주택이 있는 곳은 계획관리지역이며 임야와 밭은 농림지역입니다.
주택은 넓은 거실과 방이 있으며 별도의 넓은 창고도 있습니다.
주택은 면적이 70㎡이며 창고는 33㎡가 별도로 있습니다.
주택의 층수는 1층이며 경량철골구조로 되어 있고 방향은 동남향입니다.
건축년도는 2020년도 11월5일입니다.
수도는 지하수를 쓰고 있으며 상수도 공사 중에 있고 국도에 접해 있습니다.
넓은 밭에 농사를 짓거나 약초 묘목 채소 등을 가꾸며 전원생활을 아름답게
가꾸어 나갈 수 있습니다.
임야에서 버섯재배도 가능합니다.
본 토지가 자리하고 있는 옥강리에는 여러 마을이 있는데 유래에 대해서 살펴보
도록 하겠습니다.
우산마을은 원래 옥강리 지역에 속한 마을로서 옛날마을 부근에 소를 기른 목장이
있었고 마을 앞이 바다이므로 우목포라 부르다가 일제강점기에 마을을 한자화할 때
마을 뒷산이 와우형 이라 해서 우산으로 바꾸어 1986년 법정마을로 독립 현재에
이르고 있습니다.
내초마을은 외초 마을과 경계지역의 산모양이 새머리와 같다고 하여 “새두”라 하였고
옛 지도에는 두 마을이 초량이라 표기되어 있는데 초량의 안쪽마을이라는 뜻에서
“안새두”라고 불렀는데 1936년 마을 명을 한자화할 때 내초라고 개칭한 이래 법정
마을로 독립되어 변함없이 오늘에 이르고 있습니다.
외초마을은 처음에는 밖에 있는 마을이라 해서 “바깥 새두”라 하였는데 그 후 초량
의 밖에 있는 마을이라는 뜻에서 일제강점기에 마을 명을 한자화할 때 외초라고
불렀으며 1956년 리동 행정구역 개편에 따라 자연마을로 독립된 이래 변함없이
오늘에 이르고 있습니다.
봉암마을은 원래 옥강리의 지역에 속한 마을로서 마을 동남쪽에 “까막재”가 있다고
하여 오치라고 불러왔으며 마을 뒷산중턱에 벌 바위가 있다고 하여 봉암이라
부르다가 1980.1.1부터 자연마을로 승격 독립된 이래 변함없이 오늘에 이르고
있습니다.
그리고 나머지 정암마을은 옥강리 외초에 속해 있던 마을로 지금부터 70년 전
일제강점기시대에 진흙을 빚어 기와와 옹기를 구운 곳 이라 하여 “와등”이라 부르
다가 해창만 간척지 개답 후 외지 사람들이 모여들기 시작하여 마을 뒷편 바위가
많아 1987년도에 자연마을로 승격시 정암마을로 명명하여 현재에 이르고 있습니다.
고흥은 고려시대에는 태조 23년에는 충렬현을 남양현으로 강원현을 두원현으로
백주현을 태강현으로 고쳐 나주목에 딸린 보성군에 두었다고 합니다.
고흥현은 본래 장흥부에 딸린 고이부곡이었는데 고이는 고양이의 속어라고 하며 충렬
왕 11년에 이 고을 사람인 유청신이 원나라의 사신으로 여러 번 큰 공을 세웠으므로
고흥현으로 승격시키고 감무를 두었는데 고흥이라는 지명은 고이와 장흥의 합명으로서
조선조에 등장한 흥양 보다도 더 오래된 지명이라고 합니다.
풍안현은 보성군에 딸린 식촌부곡이었는데 충선왕 2년에 원나라에 가서 공을 세운
이대순의 청에 의하여 풍안현으로 승격되었으며 도양현은 본래 장흥부 도량도부곡이
었는데 고려에 와서 도양현으로 승격되었고 도화현은 보성군의 타주부곡이었는데,
명종 27년에 도화현으로 승격되어 고흥지방에는 모두 7개의 현이 있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조선시대의 고흥은 태조 4년 에 왜란으로 인하여 보성군 조양현 땅에 치소를
임시로 옮기고 같은 6년에 진을 두어 병마사가 현감의 일을 겸하게 하였답니다.
태종 16년에 전국을 8도로 정할 때에 전라도의 좌도에 소속되었으며 세종 5년에는
이곳에 첨절제사를 두었다가 같은 23년(1441)에는 보성군에 딸린 남양현 두원현 등
7개의 현을 합하여 고흥과 남양의 뒤 글자를 따라 “흥양현”으로 고쳐 불렀답니다.
이곳은 또한 조선시대 전라좌수영에 속한 5관 5포 가운데 사도첨절제사를 비롯하여 발포
(도화면 발포리), 녹도(도양읍 녹동), 여도(점암면 여호리)에 수군만호(종4품)를 두어
1관4포의 진을 설치한 곳으로 임진왜란 당시에는 충무공함대의 주력을 이루었을 뿐
아니라 이지방의 여러 장수가 국난극복에 모두 참여하여 많은 해전에서 큰 공을 세웠
다고 합니다.
영조 때의 기록에 ‘고흥은 예부터 별칭 영주와 같은 이름으로 산과 바다가 맑고
아름다우며 기승이 많다.’고 하였으며 또한 예부터 등과자가 많을 뿐 아니라 용력이
뛰어난 역사가 많으며 지금도 정계, 학계, 관계, 체육계 등 각 분야에 진출한 고흥출신
의 인물이 많습니다.
고종 26년에 지방제도 개혁에 의하여 흥양현을 흥양군으로 바꾸고 13개 면을 관할
하다가 1914년 4월 1일 군면 폐합에 따라 돌산군의 득량도 등을 합하여 고흥군으로
개칭하고 13개 면을 관할하였으며, 1973년 7월 1일 도양면이 도양읍으로 1979년 5월
1일 고흥면이 고흥읍으로 승격되어 현재까지 이르고 있습니다.
이렇게 고흥은 전망이 좋을 뿐만 아니라 외적의 침략에도 일치단결하여 혁혁한 공을
세우며 조국을 지켰고 좋은 인재들이 많이 탄생한 고장이기도 합니다.
이런 곳에서 자연과 함께 행복한 삶을 살며 버섯이나 약초등을 재배하며 살아가기를
원하시는 분에게는 아주 적합한 장소가 될 것입니다.
금메달공인중개사사무소는 고객님이 현명한 선택을 하실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하여
고객님을 보필하겠습니다.
언제라도 금메달공인중개사사무소 010-3061-7154번으로 연락을 주시면 성심성의껏
상담하여 드리겠습니다.
금메달공인중개사사무소의 등록번호는 가4105-1340호입니다.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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