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양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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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흥 바다부근 좋은 자리 좋은 곳 토지 땅 밭 전 매매 풍수 좋음
고흥 완만한 경사도 넓게 이어진 토지 땅 전원주택 건축 적합
고흥군 차범근 감독고향부근 토지 땅 밭 전 매매 도로에 접해 있음
고흥군 두원면 예회리 토지 땅 매매합니다.
토지의 면적은 2,813㎡이며 매매가는 2억원입니다.
토지의 형태가 완만하고 도로에 접해 있습니다.
용도지역은 자연환경보호지역입니다.
전원주택 신축하기에 아주 적합한 토지입니다.
다른 토지에 비해 약간 높은 곳에 위치하고 있어서 바다도 보이며
아름다운 풍광이 한 눈에 바라다 보이는 곳에 있습니다.
방향은 남서향입니다.
바로 옆에 예회마을이 있습니다.
본 토지가 자리하고 있는 예회리는 전 국가대표 차범근 선수의
고향으로도 잘 알려져 있는 곳입니다. 풍광이 좋고 바로 근처에 바다가
접하고 있어서 시원하고 고풍스런 느낌을 안겨주는 곳입니다.
예회마을은 고려말엽 배씨 이씨가 살았다하여 “배이동”이란 소지명이
있으며 지형이 싯돌과 같으므로 “여호”라 칭하였으나 조선 1880년에
지방행정 구역 개 폐합 당시 예날 예조판서가 이 마을을 지나다가 이곳
에서 쉬어 갔으므로 마을사람들의 예의범절에 감탄하여 마을 이름을 예회라
고쳐 오늘에 이르고 있다고 할 정도로 마음사람들의 심성이 착하고 곧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상예마을은 일제강점기 초기 1914년 지방행정통폐합 당시 예회, 상예 마을을
합하여 예회리라 하였으며 옛 지명은 “웃여우”로 윗 예회를 부르는 이름이며 훈
차하여 상예로 불러졌다고 합니다.
두원면 중에서도 성두리는 특색 있는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다.
진목마을은 옛날 이곳에 참나무가 많아 진목이라 불리어오다가 마을 우측에
금성산의 산세가 마치 백호형국이므로 호랑이 머리지점에 마을이 생겼다하여
한때 마을 이름을 “호두”라 불렀다고 합니다.
1956년 리 동 행정구역 개편에
따라 다시 “진목”이라 고쳐 현재에 이르고 있다고 할 정도로 참나무가 많습니다.
차수마을은 마을 뒷산에 차나무가 있어 마을 이름을 “차나무등”이라 불리어
오다가 일제강점기 당시 “차수”라 부르다가 1956년 리 동 행정구역 개편에
따라 자연부락으로 독립되면서 옛 마을 유래를 계승하는 뜻에서 “차수”라 불러
오늘에 이르고 있다고 합니다.
성두마을은 옛날 두원현의 현치소에 속한 마을로서 당시의 성의 흔적이 마을
주위에 남아 있으며 처음 마을 명을 “성리”라 불리어오다가 2004년 군 조례를
개정하여 성리가 아닌 “성두”로 변경해서 불렀다고 합니다.
영오리에는 영동마을이 있는데 약 500년 전 마을을 만들 당시 영동이라 칭하
였으나 그 후 수려하여 이곳에 ‘영적사’라는 절이 있었으므로 고을의 선비들이
모여 글을 읽었다 하여 마을 이름을 “영적”이라고 불러오다가 1460년 밀양
박씨가 들어와 마을을 만들면서 다시 “영동이라 고친 후 변함없이 지금까지
불러오고 있습니다.
오수마을은 삼면이 야산으로 둘러싸여 있어 산수가 수려하고 동쪽은 바다에
접하고 있어 호연지기가 용솟음치는 고장입니다. 원래 마을 지형이 까마귀
집 모양으로 형성됐다 하여 “오소”라고 불러 왔으나 마을주변에 오동나무가
많아 한때 “오동 나무골”이라고 불렀으며, 그 무렵에 오동 나무골을 한자로
음차하여 마을 이름을 오수라고 고쳐 지금에 이르고 있습니다.
용산리에는 와룡마을이 있습니다. 와룡마을은 상당히 흔한 이름입니다.
원래 마을 앞까지 바다여서 배가 드나드는 선창이 있어 ‘선창개’라 칭하였는데
1914년 행정구역통폐합 당시 주산이 용의 형국이라 하여 와룡이라 고쳐 불렀으며
두곡으로부터 박씨가 입주하기 전 한씨, 오씨, 김씨가 살았다고 하며 당시
불효였던 김씨가 3대 독자 아들이 익사하자 영주지가 못 된다 하여 대지주
였던 김씨가 떠나므로 타성씨도 점차 떠나 버려서 이곳이 빈터였기에
약210년 전인 1785년 박씨가 들어와 현재에 이르고 있습니다.
대산마을은 원래 용산리에 속하며 마을 서쪽으로 뻗은 등서리 위쪽을 상대,
아랫쪽을 하대라 칭하였으며 마을주변에 대나무가 많아 마을명을 “대뫼”
라고 불리어 오다가 일제 말에 유시규 외 선비들은 한때 마을명을 개명하여
서산시 이라고 했으나 약150여 년 전 전부터 집터 대자, 뫼 산자를 한자로
표기하여 대산으로 개칭 현재에 이르고 있습니다.
신월마을은 원래 대산마을 아래쪽에 있다하여 아랫 대산이라 하여 왔으나
1992년 10월 1일자로 분리되어 마을 이름을 “새롭게 뜨는 달”이라는 한자
뜻으로 “신월” 마을이라 불러 오고 있습니다.
금계마을은 풍수가 마을을 지나다가 마을 뒷산에 금계 포란형의 명당자리가
있다고 하여 “금계”라 하다가 하천이 흐르므로 시내 계자로 바꾸어 마을
이름을 “금계”라 칭한 이래 변함없이 지금까지 이어져오고 있습니다.
신송리에 대해서 잠시 살펴볼까요?
서신마을은 옛날에는 “간둔”이라 불렀고 신송리의 중앙에 위치한다하여
“내송”이라 하였는데 마을 지형이 와우형국으로서 남쪽으로 소머리와 소뿔
북쪽으로 소다리, 마을 중앙이 소 유방지점에 해당한다 하여 이곳에 ‘통샘물’
이 용솟아 인근마을까지 식수로 사용하고 있어 일명 샘물을 우유라고 하였으며
1914년 일제강점기 초기 지방행정구역 개편 당시 신송리로 통합되면서 서쪽에
있는 마을이므로 “서신”이라 고쳐 현재까지 불러지고 있습니다.
반송마을은 예전에 “소반등”이라 하였고 이 마을에서 고흥읍 주월산으로 배가
넘어 갔다 하여 마을 이름을 “배실”이라 불러 왔으나 1914년 일제강점기 초기에
지방행정구역 개편 당시 신송리로 통합되면서 소반등을 한자로 “반송”이라 개칭
한 후 1956년 리동 행정구역 개편에 따라 독립마을로 바뀌었습니다.
동신마을은 조선시대에는 “간둔” 또는 삼밭이 많은 곳이라 하여 마을 이름을
“마전동”이라 불러 오다가 일제초기 1914년에 지방행정구역개편 당시 신송리의
동쪽에 위치한다 하여 마을 이름을 “동신”이라 개칭한 후 1956년 리동행정구역
개편에 따라 독립마을이 된 이래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습니다.
외신마을은 운암산의 원지류인 천황산세의 끝에 뻗어 안태봉이 솟아 있는 서남쪽
에 위치한 마을로서 학곡천, 신송천, 용산천, 합류하고 있어 옛날에는 “간둔”이라
불리어 오기도 했습니다. 원래 신송리에 속해 있으면서 마을이 2개 마을로 떨어져
있었으며 윗마을은 “새멀”이라 불러 왔고, 아랫마을은 “매작들”이라 했는데 현재는
경지정리 관계로 아랫마을이 윗마을로 합해졌으며, “외신”이라 부르기 전에는 “
반동”이라고 부르기도 했다고 합니다. 일제강점기 초기인 1914년에 행정구역 개편
당시 외신이라 개칭하였는데 광복이후 1956년 리 동 행정구역 개편에 따라 독립
마을로 되면서 변경 없이 오늘에 이르고 있으며 1926년 8월 6일부터 1949년 1월
8일까지 두원면 사무소가 있었던 마을입니다.
이 외에도 여러 가지 리가 존재하고 있지만 지면관계상 여기서 생략하겠습니다.
위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두원면은 다양한 풍습과 역사가 살아 숨쉬는 행복의
고향이자 동네입니다.
좋은 곳에 토지를 구입하여 집을 짓든지 농경생활을 하든지 좋은 기가 흘러
넘치리라 확신하고 있습니다.
금메달공인중개사사무소는 고객님이 현명한 판단을 하실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하여
고객님을 보필하고 있습니다.
언제라도 금메달공인중개사사무소 010-3061-7154번으로 연락을 주시면 성심성의껏
상담하여 드릴 것을 약속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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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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